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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3(콘서트)>
1911년. 뮌헨 시민미술관. |
바실리 칸딘스키의 그림은 음악을 보여줍니다. 음악은 듣는 것이지만,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화가, 그가 칸딘스키죠.
그림에서 검은색은 피아노를, 청중을 둘러싼 노란색은 감동의 클라이맥스를 표현했습니다. 쇤베르크의 무조(無調, 장조나 단조의 규칙이 없는)
음악에 감명을 받아 편지와 함께 선물한 그림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칸딘스키는 아틀리에로 돌아와 자신의 작품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실수로 거꾸로 놓인 자신의 풍경화를 보고 생경함을 느꼈기
때문이죠. 그리고 깨닫습니다. 아름다움은 점, 선, 면, 색채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추상의 문을 연 그에게 ‘현대 추상미술의 창시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붙습니다. 개인적으로 동의하긴 싫지만, 그래도 세잔과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된 거죠.
그러나 이런 일화가 아니더라도 그는 결코 구상화로는 만족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릴 때부터 음악, 소묘를 시작했고, 스물여섯에 법학시험을
통과하고 교수 제의를 받기까지 합니다.
문학과 시, 철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등 그야말로 다재다능했기에, 사물의 형상에만 의지해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전달하는 데는 한계를 느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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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 8> 1923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
칸딘스키는 30년간 총 열 점의 구성 시리즈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주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맹렬함과 고요가
공존합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우주의 무한 공간을 표현하죠. 원은 또 사선의 날카로움을 완화해주고, 겸손과 변화를 포함하고
있어요. 왼편의 커다란 원은 작품 속에 나열된 모든 원의 근원이라는군요.
그는 학창 시절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 그린>을 들으며 색채와 선이 교차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미술을
이렇게 음악으로 비유합니다.
“색채는 건반, 눈은 공이, 영혼은 현이 있는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영혼의 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손이다.”
참, 왜 나쁜 남자냐고요? ‘가벼움’, 이건 잘난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부정적인 현상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의 가벼움은
여인과의 사랑에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재능 있는 여성화가 가브리엘 뮌터를 버린 겁니다.
그는 189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파전에서 모네의 <건초더미>를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별 것도 아닌
건초더미가 아름다운 그림이 되다니. 그에겐 감동이었죠.
서른의 나이에 시작한 미술이지만 그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6년쯤 지났을 때 11살 어린 뮌터를 만납니다. 아내 아냐와는 별거를 하고,
5년간 동거에 들어가죠.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칸딘스키가 조국 러시아로 떠납니다. 잠시일 거라고 생각한 뮌터는 4년을 기다리지만, 그는 새로운 여성과
재혼을 하고 맙니다. 아무런 기별도 없이.
그런데 여기서 제가 이해 못 하는 것은 여자의 마음입니다. 뮌터는 아픈 마음을 뒤로하고, 나치 독일 치하에서도 유대인 칸딘스키의 그림을
지키려 많은 애를 씁니다.
그리고 자신은 다른 남자를 사귀어보기도 했지만, 평생 칸딘스키를 그리워하다 85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칸딘스키가 죽은 지 18년이 지난
후에.
여자의 사랑, 그것도 뮤즈로서의 사랑. 그건 추상보다 더 감당 안 되는 난해한 고등수학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