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코 죽음을 알수 없다. 너무 크고 엄청난 두려움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것은 늘 우리에게 몇
걸음 떨어져 있는 그 무엇이다, 그러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한 우리의 마음은 편해진다. 그러나 그 또한 부질없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체험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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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 집행 직전에 형이
감형되어 10여 년간 감옥 생활 및 유형 생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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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도스토예프스키는 24세에 발표한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은 소련연방을 뒤흔들었다, 사교계의 총아가 된 그는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미하일 페트라세프스키라는 사회주의자가 주동이 된 급진주의 혁명조직에 가담했다. 3년이 지난 1848년 유럽에서 혁명이
발발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입한 급진세력은 농민반란을 기획하는 등 이 혁명의 파도에 올라타려 했다. 그러나 차르 니콜라스 1세의 추적 끝에
1849년 모두 다 잡힌다.
당시 군사법원은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린다.
"퇴역 육군 소위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 음모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정교회와 통치 권력을 거스르는 괘씸한 표현으로 가득 찬 벨린스키의
편지를 유포시켰으며, 다른 용의자들과 함께 사설 인쇄소를 통해 정부에 반대하는 서적을 유포했으므로 모든 권리를 박탈함과 동시에 8년간의 요새
유형에 처한다."
페트라세프스키 조직원 24명은 8개월 동안 군사기지 감옥에 갇혀 있다가 1849년 2월 22일, 세묘노프스키 연병장에서 사형대로 향한다.
연병장에서는 이미 말뚝이 박혀 있었고 총을 가진 병사들이 일렬횡대로 정렬해 있었다. 죄수들이 두 줄로 자리 잡자, 집행관이 사형 선고문을
읽었다. 모두의 얼굴에 두건이 씌워졌다. 그리고 총을 겨누었다. 이때 마차 한 대가 갑자기 들어서더니 병사가 내려 집행관에게 내밀었다. 그걸 본
집행관이 갑자기 손수건을 흔든다. 사격 중지를 알리는 신호였다. 이들은 죽음의 낭떠러지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살려주는 대신 "4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 후 사병으로 지위를 강등시켜 복무시킬 것"을 명령했다.
다음은 사형 직전의 공포에서 벗어난 바로 그 날, 도스토예프스키가 형 미하일에게 쓴 편지의 일부분이다.
“형, 나는 기운을 잃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곳에서의 삶이든 그것 역시 삶이고, 삶은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것이지 결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재난이 몰아닥친다 해도 의기소침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바로 거기에
인생의 과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고가 나의 살과 피가 되었습니다. (중략) 형, 그럼 안녕!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이처럼 건강하고 풍족한 영적인 생명이 내 안에서 고동친 적은 없었습니다.
오 하느님!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는지! (중략) 지금 이 순간, 나는 과거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사랑하고 포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죽음과 대면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가 되어서야 그런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과거를 되짚어볼 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었는지요. (중략) 삶은 행복입니다. 매순간이 행복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은 20년이 지난 뒤 소설 『백치』(1868)를 통해 그려지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므이쉬킨 공작은 그가 방문했던 한 귀족의
집에서 리옹에서 목격한 단두대 사형 장면과 함께 사형 언도를 받았던 사람의 마지막 몇 분간에 대해 직접 언급하고 있다. 그는 소설 1부 5장에서
이 순간의 정신적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사나이는 다른 이들과 함께 교수대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사형 판결문이 낭독되었습죠. 그는 정치범으로 총살을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20분 뒤 집행 유예가 선포되고, 다른 처벌이 내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판결 사이의 20분이나 15분쯤을, 그는 몇 분 뒤면
갑자기 죽게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흘려보냈습니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모든 것들을 기억했고, 그 몇 분 동안 일어났던 어떤 일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 말하곤 했습니다. 군인과 구경꾼들이 빙 둘러 서 있는 교수대에서 20보 가량 떨어진 거리에 수인들의 수에 맞춰 말뚝이 흙 속에
박혀 있었답니다.
처음 세 명이 말뚝으로 끌려가 묶이고, 수의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총을 보지 못하도록 수인들의 눈 위로 흰 가리개가 씌워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병사 몇 명으로 이뤄진 일개 대열이 각각의 말뚝을 바라보며 도열했습니다.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 준 사람은 여덟 번째 줄에 서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의 순서는 세 번째 그룹이었던 거죠. 사제 한 명이 십자가를 들고 그들 각각에게 다가갔습니다. 살아 있을 시간은 5분도 남지 않았을 것
같더랍니다. 훗날 그는 그 5분이 끝없는 시간의 확장, 거대한 재산처럼 느껴졌답니다. 그는 이 5분 동안에 최후의 순간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실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동안에 할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했다는 겁니다. 우선 동료들과의 작별에 2분의
시간을 쓰고 이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의 일을 생각하는 데 2분, 그리고 나머지 1분은 마지막으로 주위의 광경을 둘러보는 데 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일을 결정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는데, 그는 그 일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스물일곱 살의 건강하고 튼튼한
청년이었습니다.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그 중 한 사람에게 상당히 한가로운 질문을 하고는 그 대답에 흥미를 느끼기까지 했다는 겁니다. 이윽고
동료들과의 작별인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자기 자신의 일을 생각하기 위해 할당한 2분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미리부터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자기는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살고 있다, 그러나 3분 후에는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어떤 또 다른 인간, 그렇지 않으면
무엇인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도대체 그것은 뭘까? 이 문제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리고 명확하게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떤 다른
인간이 된다면 과연 누가 될 것인가? 그리고 어디서? 이러한 문제들을 모두 2분 동안에 풀어버리려 했단 말입니다. 형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었는데 그 금빛 지붕 꼭대기가 밝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더랍니다.
그는 무서우리만큼 집요하게 이 금빛 지붕과 지붕에 반사된 햇빛을 바라보면서 그 햇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답니다. 마치 햇살들이 그의 새로운
본성이고, 3분 후면 그는 어떻게든 그것들과 한 몸으로 용해될 것만 같았던 거죠. (중략)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이런 생각이었답니다. '만일 내가 죽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일 생명을 되찾게 된다면 어떨까, 그것은 얼마나 무한한 것이 될까,
그리고 그 무한한 시간이 완전히 내 것이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는 1분의 1초를 100년으로 연장시켜 어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1분의 1초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한 순간도 헛되어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했다는 겁니다.“
죽음 직전의 엄청난 경험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사상을 바꾼다. 죽음에 대한 경험을 통해 삶을 다시 적극적으로 포용하게 된 것이다, 몇 몇
죄수들은 그 사건이후 미쳐버렸다. 그는 당장 사회주의 사상을 떨쳐 버리고 인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수많은 명작들을
내게 만든다. 그는 한 순간도 허비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속하면서 자신이 편해지고 자기만족에 빠졌다고 느끼면 카지노로 가서 돈을 탕진해 버리곤
했다. 자신을 일종의 무의 상태로 내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매순간 행복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인생 모토로 자신을 끝없이 달금질했던
것이다. 이것이 죽음을 잊어버리 돼 죽음이 찾아와도 기꺼이 맞아들이는 경지가 아닐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