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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 낭만주의의 의미와 한계를 보여주다 노인영 논설위원

들라크루아, 낭만주의의 의미와 한계를 보여주다

노인영 논설위원  |  nohproble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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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25  09:15:05  |  조회수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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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에서 낭만주의는 규범으로부터 자유를 지향합니다. 특정한 화풍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프랑스 화단을 지배하고 있던 신고전주의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고 봐야죠.

따라서 계몽주의와 고전주의의 영향을 벗어나, 개인의 주관적 감정 표현을 새로운 창조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출발은 테오도르 제리코였습니다. 대표작은 <메두사호의 뗏목(1817~1820)>이죠. 1816년 7월 2일 아프리카 세네갈을 향하던 메두사호가 대서양에서 침몰합니다.

400여 명 중 149명이 뗏목 위에서 무려 15일간 사투를 벌이지요. 익사하거나 갈증과 굶주림으로 죽어갔고, 뗏목이 떨어져 나가자 중앙 자리를 차지하려고 폭력이 난무합니다. 심지어 죽은 동료의 시체를 찾는 광기와 공포로 가득했어요.

7월 17일 겨우 10명만 구조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난파일기를 쓴 저자 두 명이 오히려 식인 혐의로 고발되자, 제리코는 이에 분노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1년여 준비 끝에.

  
 

외젠 들라크루아가 당시 화단의 거물이었던 신고전주의 앵그르와 대척점을 이루게 되는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년 7월 28일(1830)>입니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 반혁명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어요. 국왕 샤를 10세의 강압에 맞서 7월 혁명이 일어납니다. 작품은 그 ‘영광의 3일’ 중 7월 28일, 다양한 계급이 들고 일어선 현장을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낭만주의적 회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중앙에 삼색기를 들고 있는 여성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자유의 이상을 상징하는 인물을 등장시켜 사건의 단순한 기술을 극복했지요.

순수예술에 경직되었던 앵그르 중심의 신고전주의 화가들은 ‘품위가 없다’고 비판을 했어요. 하지만 그의 그림은 강렬한 색채와 동작의 표현과 함께 새로운 회화의 시대를 예고했습니다.

  
 

그러나 <키오스 섬에서의 학살(1824)>에서는 낭만주의의 감상적 태도가 극명하게 나타났죠. 당시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들의 관심은 터키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 독립전쟁에 집중됩니다. 같은 유럽 국가라는 연대감이 작용했을 거예요.

그러던 중 에게 해의 터키 접경에 있는 그리스 섬 키오스에서 엄청난 학살이 저질러졌지요. 1822년 오스만 튀르크 군이 그리스 독립운동의 기세를 꺾으려 원주민 약 900여 명만 남기고 대부분을 죽이거나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10~15만 명이 죽고 5만여 명이 끌려갔다고도 하고, 전체 주민이 9만 명 정도였다고 하는 등 수치상 차이가 크다)
 
들라크루아도 이국적 배경에다가 스케일이 큰 이 사건에 관심을 보였죠. 거대한 역사화가 가능했기 때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 독립전쟁을 주제로 한 첫 작품이 탄생합니다.
친구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에서 ‘두 개의 삼각형이 겹치는 구도’를 차용했어요. 삼각형 구도는 매우 안정적인 형태로, 반인륜적인 사건 속에서도 인간 실존에 대한 희망을 간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접근함에 있어 깊이가 부족했죠. 특히 동방에 대해서 동료들과 같은 감상적 태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작품이 주는 혁신성과 장엄성에도 불구하고, “유럽인의 시선에서 그렸다는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들 낭만주의 화가들은 이웃 동방의 땅을 밟아보지도 않은 채 상상으로만 그림을 그렸거든요.

마지막으로 영국과 독일 낭만주의 대표 화가 터너와 프리드리히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감성에 있어서 터너가 격정적이라면, 프리드리히는 차분하면서도 관념적입니다.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를 바다에 던지다-폭풍이 다가온다(1840)>이에요. 아프리카를 떠난 노예선에서 발생한 잔인한 사건을 그렸지요.

당시 노예들은 선적된 ‘물품’이었어요. 병사(病死), 또는 자연사한 노예에 대해서는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기에 ‘유실된 짐’으로 처리하기 위해 산 채로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빛나는 태양과 거센 파도, 붉은 화염에 휩싸인 배, 그리고 떠다니는 시신들에 대한 과감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그는 돛에 몸을 묶고 폭풍우 속에서 바다를 4시간 넘게 관찰했던 집념의 화가입니다.
 
햇빛 아래 수시 변하는 강렬한 원색의 바다, 모호하면 모호한 대로 거칠면 거친 대로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붓놀림. 이 색채 처리 기법은 뒷날 모네, 피사로 등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독일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위의 방랑자(1818)>입니다. 대자연 앞에 선 고독한 한 남자를 그렸지요. 게다가 뒷모습만 보여주죠. 주변과 대화를 차단한 몰입입니다. 어릴 때 겪었던 불행한 개인사가 담겨 있지요. 엄격한 루터교 집안에서 태어나 종교적인 영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이를 통해 느낀 삶의 허무함, 자연의 숭고함에 관한 깊은 성찰이 있습니다.
 
그림의 특징은 <바닷가의 수도사(1809~1810)>에서도 보이듯 중간 지대의 풍경이 없습니다. 가까운 인물과 멀리 보이는 원경, 둘로 크게 구분했지요. 그래서 더욱 적막하고 고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