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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100회를 묘비명에 남기고 싶다

마라톤 100회를 묘비명에 남기고 싶다

허정회 논설위원  |  hjh@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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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5.22  06: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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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3일은 춘천에서 100번 째 마라톤을 완주한 날이다. 2003년 3월 첫 마라톤 이후 13년 7개월 만이다. 매년 7~8회씩 꾸준하게 달렸다.

개인 최고기록은 3시간 44분, 최저기록은 5시간 50분, 평균기록은 4시간 37분이다. 13번이나 ‘서브-4(마라톤 풀코스 완주기록이 4시간 이내)’를 했고, 3번 포기했다. 2012년 <춘천마라톤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기쁨도 누렸고, 대회 공식기록 꼴찌라는 쓴맛도 봤다.


첫 번째 돌탑을 정성 드려 쌓아 완공한 기분이다. 100은 단순하게 99 다음의 자연수만이 아니다. 100은 완성, 완전, 충족, 전부, 전체를 상징한다. 아기가 태어나 100일이 되면 인생 최초의 위기를 무사히 넘긴 축하 잔치를 연다.


 무얼 간절히 원할 때 치성을 다해 100일 기도를 드린다. 100년을 묶어 1세기라 하고, 시험은 보통 100점을 만점으로 한다. 100회 마라톤이 쉽지 않음은 그걸 목표로 건강과 친목을 다지는 동호회도 있다. 이렇듯 100이란 숫자가 지니는 의미는 각별하다.


사람마다 마라톤을 하는 이유는 다 다를 것이다. 나는 행복을 위해 마라톤을 한다. 행복에는 3가지 공통점이 있다 한다. 사람은 자유로울 때, 무슨 일을 잘 할 때 또 그로 인해 인간관계가 강화될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서울대에서 <행복론>을 강의하고 있는 최인철 교수의 지론이다. 마라톤을 하면 이 3가지를 다 충족하게 된다. 마라톤을 완주한 모든 선수 얼굴에 언제 힘들었냐는 듯 행복이 가득 번져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제70회 <춘천마라톤>이 열리던 공지천교 일대는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섭씨 14도 아침 기온이 오후까지 이어진다는 예보가 있었다. 비만 안 온다면 달리기에는 최적인 날씨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인기 있는 대회답게 대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오늘 동반주할 모교 신일고 OB마라톤클럽 회원들과 제일 마지막 H조에서 출발했다. 9시 정각 엘리트 선수들이 출발한 지 20분만이다.


5시간 서명숙, 임포재 페이스메이커를 따라 출발했다. 이제까지 마라톤을 하면서 5시간 ‘페메(페이스메이커)’를 따라가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초반에 천천히 달려 에너지를 비축하여 30km 이후에도 일정하게 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서명숙 페메는 풀코스 200회 완주 중 50회 페메 경력을 지닌 베테랑이다. 임포재 페메도 울트라 마라토너로 다부진 체구가 믿음직스러웠다.


서명숙 페메가 '마라톤은 소풍이고 여행'이라고 한 말에 공감이 갔다. 그렇게 생각하고 웃고 즐겨야지 5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고 했다. 중간 중간 달리기에 도움이 될 만한 얘기도 하고 무엇보다 팀을 재미있게 하려고 애썼다. 오늘 내가 100회에 도전한다는 걸 알고서는 나를 팀 전체에 큰 목소리로 소개해 줘 많은 선수들의 환호를 받았다.


내 좌우와 뒤로 모두 3명의 회원이 나와 함께 달렸다. 셋 다 울트라 마라토너로 오늘 나의 든든한 동반자다. 100회째 마라톤을 하는 특별한 날, 만약 혼자 달린다면 자기 홀로 생일상을 차려 먹을 때보다 더 쓸쓸할 거 같았다. 오늘 이들과 함께 하기에 외롭지 않았고 평소보다 더 잘 달릴 수 있었다. 이중 1명은 울트라마라톤계 고수로 평소 울트라만 하는데 오늘 나와 동반주를 하기 위해 7년 만에 풀코스를 달렸다.


마라톤의 장점은 여럿이다. 그 중 나는 집중과 인내를 앞세운다. 평소 꾸준한 연습과 대회 참가를 통해 삶에 필수인 이 두 덕목을 갖추게 된다. 사람마다 달리기 능력은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서브-3(마라톤 풀코스 완주기록이 3시간 이내)'를 하고, 어떤 사람은 5시간대를 달린다. 그러나 기록은 문제되지 않는다. 기록을 앞당기기보다 마라톤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좇아 달리는 게 중요하다. 나이 듦을 인정하고 이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 오랫동안 달릴 수 있게 된다.


2시간 25분만에 신매대교 하프지점을 통과했다. 첫 5km만 35분대로 달렸고, 그 이후 지금까지 매 5km를 33분대로 달리고 있다. '서브-5(마라톤 풀코스 완주기록이 5시간 이내)'도 가능한 페이스다. 이제 곧 춘천댐 오르막이 시작된다. 여느 때 같으면 하프 지나면서 힘들었는데 오늘은 아직 기운이 남아있다. 3주전 <국제평화마라톤대회>에서 달렸던 걸 다리근육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작년 춘천댐 오르막에서 내가 힘들어 고개를 숙이고 가자 어떤 주자가 내게 전방을 보면서 달리라는 팁을 주던 생각이 났다. 오늘은 내가 그런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을 해줬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28km 지점 춘천댐을 올라왔다. 제일 고비라는 25~30km 구간을 35분대에 통과했다.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14년째 춘천마라톤에 개근하고 있지만 비 맞기는 처음이다. 많은 비가 아니기에 오히려 더워진 몸을 시원하게 식혀준다. 32km 춘천 시내 평지로 이어지는 3차례 언덕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고 오로지 달리기에만 집중했다. 오르막은 물론이고 내리막에서도 힘이 있어야 자기 페이스대로 달릴 수 있다. 아직 몸이 가볍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아까 7km 지점에서 헤어졌던 5시간 페메가 우리를 따라 왔다. 페메도 시원치 않게 하면 나 홀로 되기 십상인데 여전히 대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만큼 리더십이 있다는 방증이다. 35km 신동 삼거리까지 5km를 38분대로 지나갔다.


평지지만 직선 대로라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 뜀 하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잘 버텨준 다리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마지막 하나 남겨 둔 에너지젤을 먹었다. 속으로 ‘나는 할 수 있다’를 끊임없이 되뇌었다. 근육 긴장을 풀기위해 즐거웠고 행복했던 때를 생각하면서 혼자 미소 짓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소양2교를 건너고 있었다. 머지않아 40km 지점부터는 우리 회원들이 나의 100회 완주를 축하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단체로 동반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힘이 치솟았다. 이제까지보다 약간 뒤쳐진 40분대로 40km 지점을 통과했다.


생각보다 많은 회원들이 응원 나왔다. 축하 플래카드 상단에는 내가 달렸던 마라톤에 대해 썼던 책, ≪발과 마음과 혼으로 달린다≫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마라톤을 하면서 느꼈던 감상과 소회를 대부분 글로 남겼다. 서툰 글이지만 마라톤을 시작한 지 10년, 마라톤 완주 70여 회 되던 2012년, 그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어느 평범한 달리미의 마라톤 일지’라는 부제를 달았다. “초주검이 되도록 생고생하며 달려놓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계속 달리기만 한다는 것은 너무 허무해 보였다. 무언가 그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이 글들은 나로 하여금 계속 달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책 머리말에 쓴 글이다.


회원들과 함께 달리니 더욱 힘이 났다. 그들이 ‘허정회! 100회!’를 계속 연호했다. 그럴 때마다 연도에서 응원하던 사람들이 축하 박수를 쳐줬다. 드디어 결승선 아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발은 점점 빨라졌다. 막판에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회원들과 함께 마지막 2km를 신명나게 달렸다. 카메라맨들에게 멋진 포즈를 취하며 골인했다. 5시간 2분대의 기록이었다. 비록 서브-5는 못했지만 매 km 당 7분대의 고른 페이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순간도 걷지 않고 달렸다.

나는 마라톤을 하면서 좋은 습관을 많이 들였다. 무엇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하루를 새벽 한강 달리기로 열었다. 환갑 되던 해 오랫동안 마라톤을 하고 싶어 즐기던 술도 끊었다. 남들 하는 대로 다 하고 살면 내가 좋아하는 마라톤과 머지않아 작별하게 될 것 같았다. 벌써 5년째 돼간다. 친구들이 “너 혼자 오래 살아 뭐할거냐”고 시비를 걸곤 하지만 이제 그런 말에는 별로 개의치 않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이 ‘위대한 마라톤’을 100회 완주했다. 마라톤을 몰랐을 때 대체 마라톤을 하는 사람은 어떤 괴물일까 궁금했다. 2002년 6월 <한일월드컵> 무렵 우연한 계기로 달리기 세상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한두 번 달리게 된 것이 어느덧 100회가 되었다. 나는 마라톤이 있는 주(週)에는 항상 몸과 맘을 더 조신(操身) 했다. 마라톤 출발 전에는 무사히 완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언젠가 이 세상을 하직 하게 되는 날, 나는 가족들에게 이 한 마디는 꼭 하고 싶다. 내 묘비명에 ‘마라톤을 100회 완주한 사람’이라는 걸 남겨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