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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완성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노인영 논설위원  |  nohproble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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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5.04  06:30:11  |  조회수 :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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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의 주제는 통상 유다의 배반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1495~1497)>은 전혀 다른 구도를 취했지요.

열두 제자를 세 명씩 무리를 나누어, 성경에 나타난 각각의 인물 특성을 함축시켜 놓았죠. 그림은 성경 한 권을 압축했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벽면의 사선을 쭉 연결해 보세요. 그리스도 뒤로 모아질 겁니다. 이것을 소실점이라 합니다. 원근법의 대표적인 작품이에요.

레오나르도는 느긋한 게으름뱅이였습니다. 재빨리 칠을 해야 하는 당시 프레스코화(畵)는 그에게 맞지 않았죠. 프레스코는 소석회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에 바른 후 건조되기 전에 그림을 완성해야 하지요.

석회가 마르면 반죽에 물감이 스며들면서 그림이 오랫동안 보존되죠. 반면, 한 번 그리면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어요. 그래서 프레스코화가 대세인 피렌체나 로마에서는 데생이 매우 중요합니다. 물감을 칠하기 전에 데생을 해놓고 한 번에 붓질을 하기 때문이지요.

나중에 소개할 베니스 화풍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캔버스에 유화를 사용하는 그곳에선 얼마든지 덧칠로 수정이 가능하지요. 따라서 데생보다는 색조의 변화에 집중할 수 있죠.

어쨌든 레오나르도는 별도의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열로 물감을 녹여 벽에 칠하는 ‘템페라 기법’입니다.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걸작인 <최후의 만찬>은 이 방법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습기 찬 곳이었죠. 몇 해를 가지 못해 바닥이 들뜨고, 곰팡이가 생겼습니다. 물감의 특징을 파악하지 못한 복원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요.

   
 

이 그림은 <담비를 안은 여인(1485~1489)>입니다. 폴란드 크라쿠프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모나리자> 못지않죠. 담비는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을 상징합니다. 레오나르도에게 <최후의 만찬>을 주문한 인물이죠.

모델이 아름답죠? 스포르차 공작의 정부(情婦) 체칠리아 갈레라니입니다. 얼굴은 <모나리자>에서 처럼 3/4만 정면을 향했죠. 소위 ‘얼짱 각도’입니다. 투명한 피부, 긴 손가락 등 인체의 표현이 신비하면서도 몽환적인 효과를 냈고요.

‘스푸마토 기법’ 입니다. 색과 색 사이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깊이와 오묘함을 더해 주는 음영법이죠. 다 빈치가 최초로 사용했다고 해요. 그의 주저주저하는 성격하고도 잘 맞아떨어지는 기법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피렌체 근교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름이 ‘빈치 마을의 레오’라는 뜻이죠. 어머니 카타리아는 농사꾼의 딸로, 공증인이었던 아버지 세르 피에로와 신분 차이로 인해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죠. 서자였습니다. 때문에 재주가 남달랐어도 당시 주류 사회에 편입하지 못했죠. 그러다 보니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고요. 라틴어를 몰랐고, 스물세 살 아래 미켈란젤로보다 철학적·신학적 기반이 취약해지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는 수학과 음악을 좋아했으며 해부학은 물론 기체역학, 동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지요. 무기체계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불행한 것은 그의 천재성이 한 방향을 지향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인체의 구조에 대한 관심만큼,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발견하기 어려웠죠. 예술가로서 자존감이 부족했고, 책임감이 없었지요.

시(市)에서는 넘겨준 대리석 덩어리를 손도 대지 못한 채 남겨 두었는데 3년 뒤 미켈란젤로가 그것으로 <다비드>를 완성하죠. 벽화 <앙기아리의 전투>는 죽을 때까지 미완성이었고요.

성정이 거칠고 매사에 치열한 미켈란젤로가 이런 그를 존경했을 리 만무합니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마돈나, 그러니 ‘리자 부인’이란 뜻입니다. 더는 설명이 필요 없겠죠. 루브르 박물관을 다녀왔다는 ‘인증 샷’이잖아요.

1516년 프랑스 프랑수아 1세는 존경하는 예순네 살의 다 빈치를 초청합니다. 그는 동갑내기 주군 루도비코를 잃고 십 수년 방랑하던 차였어요.

앙부아즈 성의 아름다운 저택에서 그는 기력을 다해 <모나리자>를 다듬었습니다. 그러나 이조차 다 끝내지 못하고, 결국 이국땅 프랑스에서 숨을 거둡니다.

1519년, 예순일곱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렇게 한탄했다고 합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다.”

그는 평생 미켈란젤로에게서 소외감을 느꼈을 겁니다. 귀족 출신인 미켈란젤로가 플라톤이라면, 서자인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였죠.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외롭고 불안정한 생활을 견디게 한 것은 그의 느긋한 성격과 게으름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만약 그가 좋은 집안에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면 어땠을까요? 남긴 작품은 스무 편 남짓 되지만, 무려 1만3천 쪽에 달하는 노트가 그의 번민을 말해줍니다.

   
 

레오나르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 앵그르의 <다 빈치의 임종을 지키는 프랑수아 1세(1518)>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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