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는 이런 일을 견디지 못하였다. 본래 내성적이고 과묵한데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않는 곧은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성균관에서 배우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기묘사화가 휩쓸고 지나간 뒤라 모두들 건방끼가 넘쳐 있고 행동거지가 가볍고 경솔하였다. 퇴계는 성균관에 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퇴계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려 매우 조심했다.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에만 매진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개혁이니 사회참여니 하는 것은 자신의 지식이 영글고 지혜가 쌓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 단편적인 지식으로만 세상을 보려하다가는 크게 그르칠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퇴계는 성균관에서 지내는 동안 늘 법도있게 행동하였으며 이는 다른 유생들의 모범이 되었다. 퇴계의 그런 행동거지를 보고 잘난척한다며 뒤에서 비웃는 자들도 있었으나 그는 절대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다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새들 속에서도 봉황의 뜻을 아는 자가 있는 법이다. 하서 김인후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반론하여, 이기(理氣)는 혼합(混合)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律曆)에도 정통하여 조정의 주목을 받았다.
두 사람은 뜻이 잘 맞았다. 김인후 역시 퇴계와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깔끔하기가 지나쳐 상대에게 절대로 피해를 주는 법이 없었으며 후배라 할지라도 깍듯히 예를 표하며 정성을 다했다.
사상적으로도 퇴계와 호흡이 잘 맞았다. 두 사람은 서로 돕고 충고하며 학문에 매진하였다. 김인후는 퇴계를 무척 존경하였다. 이때 김인후 나이 24세였는데 비록 비슷한 나이지만 퇴계의 학식과 품위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두 사람은 실과바늘처럼 붙어 다녀 주위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퇴계는 새삼 세월의 무상함에 놀랐다. 북쪽하늘로 새들이 긴 여행을 채비하고 있었다. 퇴계는 가슴에 남아 있는 빈둥지를 채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단 말인가? 내 존재는 어디에 터를 두어야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