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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론주의적 삶에 대한 단상

“사랑의 연금술만이 불행과 비애를 깨달음의 기쁨으로 바꿀수 있다. 이 속에 바로 살아가는 모든 뜻이 있다.”

 

아마도 톨스토이가 한 말인 이 문장은 익히 아는 말이지만 요즘처럼 가슴에 별빛처럼 날아와 박히는 일도 드문 듯 하다.

사랑은 불가에서도 기독교에서도 강조되는 말이며 니체나 톨스토이 등 다수의 현인들에 의해 강조됐던 노동의 기쁨과 함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실천적 도구로서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잘 살아가는 방법”으로는 좀 부족한 듯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예수나 석가의 정신처럼 무작정 사랑하거나 남을 무작정 이해하고 무작정 돕고 하는 일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자기위안으로서의 노동이 아니라 삶을 영위해 나가기위해 매일 노동을 하러 나간다면 그 또한 쉽게 지치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피론주의다, 이 철학은 한마디로 “인생은 진지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 에피투로스학파, 회의주의는 고대로부터 유용하게 제시돼 왔던 삶의 철학이다.

 

이 중 스토아학파, 에피투로스학파는 곤경에 대비하고 주의력을 집중하며 좋은 습관을 길러 자신을 치료하는 요령을 수련하라고 가르친다. 회의주의자는 늘 증거를 찾으려고 하고 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회의주의자들 속에서도 피론주의는 처세술이 좀 다르다. 이 학파는 그리스 철학자 피론(Pyrrhon)이 창시한 것으로 교조적 회의주의나 비실용적 회의주의와는 좀 달랐다.

 

‘피론주의 개요’ 라는 책은 “인생은 진지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피론주의는 인생에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들을 “나는 포기(억제)한다(epokhe)”고 말한다.

 

여기에는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의 “무심”과 유사한 철학적 의미가 있다. 또, 노자나 장자, 불교의 공(空) 혹은 허(虛), 선(禪)사상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에포케는 선문답같은 면이 있다. “도마위에 있는 물고기가 칼날을 피할수 있을까요?” “솥에서 끓고 있는 멸치에게 물어보게나”하는 식으로 우리는 사물의 핵심을 에둘러 접근하여 지혜를 깨닫게 되는 것처럼 피론주의도 그렇다.

 

에포케의 요령을 잘 알게 되면 늘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다. 가령 “하늘의 별이 몇 개냐”고 누가 물으면 보통 “나는 모른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피론주의적으로 답한다면 에포케라고 답하면 문제가 없어질 것이다. 그가 2억5639개라고 우기더라도 담담하게 에포케라고 답하면 시비가 없어진다.

 

좀 더 세련되게 답하려면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어느 것이 정설인지 어느 것이 과학적인 증명을 거친 것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좋겠다.

 

나아가 파스칼이 팡세에서 한 말 “피레네산맥 이 쪽에 있는 것이 정의이고 저쪽에 있는 것이 부정의다”라는 격언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면 살아있는 동안 시비가 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하는 우매한 질문같은 것도 모두 에포케로 넘겨버린다면 하늘에 별이 몇 개니 하는 식의 미치광이들의 질문에도 답답해지지 않을 것이다.

 

피론주의는 긴장 이완용으로 매우 좋다.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으면 스토아학파와 에피투로스학파와 공유하고 있는 아타락시아(평정)에 도달하여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피론주의는 모든 것에는 정답이라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일이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논쟁에서 이기면 피론주의자가 옳은 것이고 지더라도 알고 있는 사실을 의심하는 그들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호적이면서도 대립적인 입장을 동시에 취할수 있다.

 

피론주의 창시자 피론은 늘 초연하고 침착하게 처신해야 하므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전혀 반응을 보일수가 없었다. 어디를 향해 걸어가다가도 마차가 오거나 벼랑에 나타나도 그냥 걸어가야 했기 때문에 주위에서 그를 구해준 적도 몇 번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도 누이동생과 싸우고, 미친 개에게 물릴 뻔하자 개를 지팡이로 내리치기도 하는등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이기도 했다니 인간은 어쩔 수 없는 ‘너무나 인간적인 존재’임에는 분명한 것같다.

 

참고로 프랑스 정신의 아버지라 물리는 몽테뉴도 에포케을 신조로 삼고 자신이 만든 메달에 에포케라고 새겨 놓고 늘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대화를 나눌 때 “아마” “어느정도” “내 생각에는” “내가 보기에는” 같은 말로 논쟁을 피해갔다고 하니 대철학자를 따라해 보는 것도 기쁨과 행복을 만들어가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