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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행복신문 험난한 원융무애의 길

만청 주장환 2017. 3. 13. 23:10

험난한 원융무애의 길

윤진평 (본지 회장)  |  yjp00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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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13  08:4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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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가《금강경》을 해설하면서 파당을 이루는 사람들은 ‘소리 높여 요구하는 마음, 찾아 헤매는 가슴’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하겠다. 이런 사람들은 치우친 자세와 편동(偏動)에 의해 비틀어진 몸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는 진리(태양)를 찾을 수 없다.


우리 정치사는 당파로 얼룩져 있다. 얼룩져 있다는 말 자체가 ‘당파=나쁜 것’이라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어느 집단이든 분파가 있기 마련이다. 박근혜를 좋아하는 친박이 있고 비박이 있으며 문재인을 좋아하는 그룹이 있고 안철수를 좋아하는 그룹이 있다. 편당이라는 것은 결코 청산될 수가 없다.


어떤 지도자가 무슨 일을 추진하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 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편을 가르지 말라’고 들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자, 석가, 예수 같은 사람들로만 구성되지 않는 한(아니 이들이 모여도 생겨난다) 편당이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정치사는 무조건 자신과는 다른 그룹에 대해 파괴적이다. 선의의 경쟁으로 한 발 나아가지 못하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니 되는 게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동의를 받아서 뭘 하려고 해도 되는 게 없었다. 도움은커녕 사사건건 비판만 하더니 마침내는 힘을 모아 탄핵시키고 말았다. 탄핵은 우리 모두에게  죽비를 내리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치고 장구치고 춤을 춰대는 행태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어 막힘과 분별과 대립이 없으며 일체의 거리낌이 없이 두루 통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원융무애(圓融無礙) 사상(화엄의 법계연기)도 신라 이후 사라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박정희 시대만큼 격렬한 편견이 뒤섞여 있는 시대도 드물다. 유신체제와 산업화는 보는 관점에 따라 그 평가가 확연히 다른 것이다. 과(過)만 보는 사람들은 과다하게 공격한다. 공(功)만 보는 사람은 지나치게 과장한다. 과를 보는 사람의 말에서 나오는 첫마디는 대부분 ‘암울한 시대’, ‘독재’ 뭐 그런 말이다. 공으로 보는 사람은 ‘경제적 기적’, ‘지도력’ 등을 내세운다.


양측 다 나름의 이유와 근거기 존재한다. 3선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과 인권문제 등은 비판을 받아야 할 문제이나 여기에는 합리적인 민주주의를 통해 과연 경제기적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세계적으로 산업화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민주주의 체제를 굳힌 나라가 없다는 것도 반면교사다. 더군다나 장기집권 기간 동안에 부패하지 않았다는 점도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당시 우리보다 잘살았던 필리핀만 보더라도 마르코스-이멜다의 부패로 망하지 않았던가. 아프리카의 우간다 등 대부분의 나라가 산업화 단계에서 실패했고 에바 페론의 전설이 있는 아르헨티나도 한때 고약한 처지로 내몰렸다.

이 점에서 특히 종북좌파의 편견은 아주 무례하다. 화폐개혁이란 극약 처방까지 쓰고도 결국 실패로 돌아간 북한의 경제실패와 주민의 처참한 인권유린 실태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자기가 몸담고 있는 만만한 대한민국의 약점만 물어 늘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 비정상이다.


사람의 머릿속에는 편견이 늘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살아온 환경에 의해 인간은 그렇게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견을 조금이나마 줄이려 노력한다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벗어나게 되고 그것이 공자 말씀의 꽁무니라도 잡는 방법이 될 것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 태이불교(泰而不驕), 주이불비(周而不比)와 비슷한 말이다.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과 공존의 논리로 볼 수 있는 반면에, 동(同)은 획일적 가치만 용납하는 지배와 흡수의 논리가 우선한다. 군(群)과 당(黨)도 마찬가지로 대조된다. 군(群)은 단순히 여러 사람이 모인다는 뜻으로 감정적 색채가 없는 중립적인 말인데 반해, 당(黨)은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도당을 이루어 집단행동을 한다는 뜻으로 부정적인 색채가 강한 말이다.


군(群)과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한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한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고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하다.


많은 선각자들은 ‘어떤 대상을 보기 위해서는 그것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간여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지난 시절 자신이 보고 듣고 기억하고 경험한 것 등이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 대상과 함께 현존할 수 있고 그럴 때에만 진실을 볼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자연 그대로 태초의 그대로 ‘아이의 그 모습대로’(이 말은 니체도 했다) 그 눈으로 봐야 한다. 거기에 어떤 편견이 존재하겠는가? 그 단계에까지 가기만 한다면 소통의 메커니즘은 이미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정(테제)이 그것과 반대되는 반(안티테제)과의 갈등을 통해 정과 반이 모두 배제되고 합(진테제)으로 초월한다고 헤겔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諸法)이 공(空)하다는 실의가 있고, 세상의 현상과 사물은 차별이 없다는 불이사상(不二思想)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어 막힘과 분별과 대립이 없으며 일체의 거리낌이 없이 두루 통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원융무애(圓融無礙) 사상(화엄의 법계연기)도 신라 이후 배워 왔다.


한쪽으로 가니 그쪽이 옳고, 다른 쪽으로 가보니 그쪽도 옳다면 정과 반을 모두 초월하여 하나로 묶어서 전체를 포용하고 감싸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김정남을 암살하고도 박근혜정부 음모라고 했다가 말레이시아 정부 음모라고 말을 돌리더니 마침내는 UN의 음모라고 어거지를 쓰는 북한하고는 원융무애하기가 지난하지 않겠는가? 할 수 있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직 정신 못 차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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