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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와 렘브란트의 빛과 그림자

만청 주장환 2017. 6. 22.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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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와 렘브란트의 빛과 그림자
노인영 논설위원  |  nohproble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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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6.19  09:22:58  |  조회수 :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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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렘브란트 반 레인입니다. 두 사람 모두 베네치아 화풍과 카라바조를 이어 색조와 명암을 잘 사용한 화가들이죠.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큰 대조를 보입니다. 루벤스가 빛이라면, 렘브란트는 그림자가 두드러진 인생이었지요.

   
 

기억나세요? <플란더스의 개>라는 일본 만화 영화. 거기서 가난한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1611~1612)>입니다.

영화 마지막에 노래 <아베마리아>가 배경으로 깔리면서 네로는 마침내 이 그림을 보죠. “이제 죽어도 좋아”라며 행복하게 웃는 네로. 그리고 파트라슈와 함께 이 거친 세상을 떠나는 순간, 어린 나도 그와의 작별이 서러워 많이 울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십자가 세움>과 함께 벨기에 안트베르펜(엔트워프) 대성당에 있는 대표적인 기독교 제단화에요. 작품은 전반적으로 색채가 화려하고 역동적입니다.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의 풍경에 인물의 감정을 결합하려고 노력했죠. 드 필은 <화가 비교론>에서 소묘, 색채, 구성, 표현, 전 분야를 종합하여 루벤스를 가장 우수한 화가로 평가하지요.

그러나 영화가 주는 고정관념과는 달리 루벤스의 실제 삶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외교관이기도 했으며, 돈도 많이 벌었어요. 죽을 때까지 재산이나 명성이 기운 적이 없지요.

유럽에서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 못해 공방에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고 있었죠. 마치 앤디 워홀처럼.

   
 

잠깐 이야기를 곁가지로 옮기겠습니다. 처음으로 우리와 관계있는 그림, <한복 입은 남자(1606~1608)>를 소개하기 위해서죠. 서양인 화가가 그린 최초의 '한국인 그림'이에요.

우리에겐 작품성보다 이야깃거리가 풍부합니다. 1983년 드로잉 사상 최고가인 32만4000파운드(당시 약 3억8000만 원)를 받은 사실과 작품 속 인물이 누구인지가 화제였지요.

입고 있는 옷은 조선 시대 사대부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용되었던 ‘철릭’(天翼)입니다. 모델은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포로로 잡혀 왔다가 로마까지 가게 된 인물이지요. 작가 오세영은 여기서 착안하여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썼습니다. 한편, 다른 작가는 장영실과 연결하기도 했고요.

루벤스 다음 세대 화가인 렘브란트입니다.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가진 화가도 드물지요. 그림도, 삶도, 당시 그의 조국 네덜란드의 역사도 굴곡이 참 많았습니다.

그는 루벤스와 차별화를 위해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비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했어요. 암흑 속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듯 주인공과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하는 방법입니다.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1632)>를 볼까요. 당시 유럽에는 왕과 귀족, 지식인들 사이에 과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습니다. 특히 인체 해부는 돈을 받고 보여주기도 했죠.

이 그림은 외과 의사 튈프 교수의 강의 1주년 기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단체 초상화죠. 핀셋으로 힘줄을 잡고 있는 모습이 실제 해부학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어요.

그러나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초점이 인물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림 속의 일곱 명, 암스테르담 외과 의사 길드 회원들이 만족스러워했어요.

이전의 낡고 경직된 초상화 형태를 벗어나 생생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주문이 밀려들지요. 26세에 불과했던 렘브란트를 단번에 유명하게 해준 출세작입니다.

   
 

또 하나의 대표작 <프란스 반닝코크의 민병대(1642)>을 보겠습니다. 1581년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연방 공화국을 세웠지요. 그리고 ‘30년 전쟁(1618~1648년)’에서 프로테스탄트 국가(덴마크, 스웨덴, 프랑스)를 지원하면서 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합니다.

그림은 황금기를 맞은 17세기 네덜란드를 보여줍니다. 시민에 의한 통치, 공화국임을 입증하는 그림이죠. 역시 빛과 어둠, 자연스러운 자세 등을 통해 집단 초상화의 생동감을 살렸습니다.

그림 왼편에 빛을 받은 소녀는 초상화에서 보기 어려운 가상 인물이에요. 그녀의 허리춤에 거꾸로 묶인 닭(맹금류)의 큰 발톱이 민병대를 상징하죠.

그림은 인물 전체의 역동성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러나 작품 속 군인 중 상당수가 불만을 품습니다. 어둠 속에서 들러리를 섰다고 생각해서죠.

또 본부 벽을 장식하기에는 너무 크다(4.5m×5m)는 이유로 작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왼편 부분을 과감하게 잘라버립니다. ‘이탄 난로’의 심한 그을음으로 그림은 점점 검게 변하고요.

한 세기가 지나자 작품에 대한 해석까지 바뀝니다. 야음을 틈타 기습을 나가는 장면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배경이 낮인데도 <야경>, 또는 <야간 순찰>이라고도 불리죠.

이때부터 렘브란트의 삶도 그림처럼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부정적인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고집해요. 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림 주문이 끊기지요.

게다가 큰 집과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사들인 고가의 미술작품과 장신구로 인해 부채가 급증합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아내 사스키아가 죽습니다. 그녀는 시장의 딸로 그의 신분 상승을 도왔죠. 결국, 파산했고 모아 둔 재산은 모두 경매 처분됩니다.

   
 

렘브란트 자화상이에요. 왼편은 그의 나이 34세, 성공한 화가의 지위와 야심이 엿보이지요. 젊은 시절 그는 잘 나갔습니다. 이른 나이에 천재성을 발휘했고, 신흥 부르주아로부터 환영받았어요.

그러나 개인의 역사에도 운명의 시샘은 따라 다니는가 봅니다. 아내에 이어 딸 셋과 재혼한 스토펠스, 자신을 돌봐주던 스물일곱 아들 티투스까지 먼저 보냅니다.

오른편 <웃고 있는 자화상>은 아들까지 죽은 이후 62세 때 모습입니다. 최후의 자화상으로, 웃고 있어 더욱 애잔하지요. 이듬해인 1669년, 몸을 의지했던 며느리의 집에서 그도 저세상으로 돌아갑니다.

렘브란트는 생전에 자화상을 백여 점 그렸다고 해요. 좋으면 좋은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자신의 내면에 충실했어요. 그의 회화에 관한 철학처럼 솔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