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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리(貪利)를 버려야 상리(相利)가 된다

만청 주장환 2017. 4. 15. 07:59




요즘과 같은 디지털시대의 진보된 물질문명은 우리 인간의 행복추구에 대한 욕구를 상승시킨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이기심은 탐리(貪利)의 형태로 나타나 인간사회에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짧은 글 하나가 떠오른다.


“어느 병실에 두 사람의 환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창 쪽에, 다른 한 사람은 벽 쪽에 누워 있었다. 벽만 보이는 쪽의 환자가 답답해 할 때면 창 쪽의 환자는 바깥 풍경을 열심히 이야기해 주곤 했다. 막 지는 낙엽이며, 환하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 그러던 어느 날 벽 쪽의 환자는 창 쪽의 환자가 의식불명에 빠진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창 쪽 자리를 탐내어 간호사를 부르지 않았다. 창 쪽의 환자가 죽자 그는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보게 된 것은 높다란 붉은 담뿐이었다.”


탐욕에 눈멀어 이웃의 사랑을 거짓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는 인간이 가지는 양심과 도덕을 바탕으로 한 삶의 가치관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공영할 수 있어야 한다. 나만 행복하겠다고 하는 이기심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행복추구의 절제, 즉 쾌락을 자제하고 사회 정의를 자발적으로 의식하여 공존공영의 상리(相利)의 형태로의 가치관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 상리는 두 사람이 함께 의자에 앉아 그네를 타는 것이다.


상리란 무엇일까? 그것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공생관계다. 악어의 이빨을 청소해주며 살아가는 악어와 악어새, 콩과 뿌리혹박테리아, 꽃과 나비, 이 모두가 아름다운 상리의 관계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윤리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우리 삶에 있어서 타인에 대한 배려나 사회발전을 위해 자신을 어떠한 규범 속에 넣는 것은 윤리다. 또 그것으로 상대를 위해 일할 때 상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은 듯 하다. 종교적인 철학과 신념으로 타인을 위하고 박애의 정신으로 公利(공리)적인 삶을 실천하는 훌륭한 사람들도 있지만 애국, 박애, 사회정의 등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탐리를 추구하는 위장된 이기심이 집단 이기심화 하여 선동적이고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군집생활 속의 자기영역에 대한 방어와 안주의 본능을 지닌 물질시대의 인간군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인 현상이다. 이들은 소극적 방어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갈등과 충돌에 대한 두려움을 호도시키면서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인간사회를 혼돈의 세계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일까? 언뜻 생각하면 그런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한 늙은 인디언 추장이 아이에게 말했다.


"얘야,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서 두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 그 놈이 가진 것은 화,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거만, 자기 동정, 죄의식, 회한, 열등감, 거짓, 자만심, 우월감, 이기심 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로, 그는 기쁨, 평안, 사랑, 소망, 인내심, 평온함, 겸손, 친절, 동정심, 아량, 진실, 믿음을 가지고 있단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아이가 묻자, 추장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그렇다. 세상은 이처럼 가변적이다.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고 할 수 없으며 악이 반드시 처벌 받는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탐리를 추구하고 이기심이란 낡고 두터운 외투를 벗어 던지지 못하나 보다. 그러나 우리는 공리와 상리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라 믿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능한 한 이성을 가지고 사회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정반합 중 합의 과정인 사회 안정과 평화를 보다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